“행복한 부부가 되려면”

존 그래이(John Gray)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이 책 내용은 남성과 여성, 특히 부부가 얼마나 다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이 책이 아니더라도 결혼한 사람이면 배우자가 자신과 얼마나 다른지를 경험하며 산다. 부부생활에 있어서 어려운 점은 ‘서로 너무 다르다’라는 것이다.
첫째, 성장배경과 타고난 성향이 다르다. 둘째,출생서열이 달라서 배우자를 습득된 행동으로 대하려고 한다. 셋째,가치관이 다르다. 넷째,성에 관한 관점이 다르다. 다섯째,경제적 관점이 다르다. 이 밖에 부부가 서로 기질과 성격이 너무 달라서 마치 외계인과 함께 사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필자는 아내와 성격이 매우 다르다. 필자는 세심한 편이고 아내는 좀 무딘 성격이다. 필자는 성격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그것을 보는 아내는 질식할 것 같은 표현을 보인다.
필자가 느끼는 아내의 성격도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서로가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다르기 때문에 부부는 얼마나 인내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도 암담한 것은 생을 마칠 때까지 그 다른 점과 도저히 접촉점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찌로다(창2:24).”라고 설파한다. 다른 점이 많아 마찰이 있는 부부가 어찌 한몸, 한뜻으로 살아간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다. 서로 다른 부부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하나로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사랑 밖에는 없다. 기독교의 사랑은 다른 것을 같게 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끼리 있는 그대로 어우러져서 하나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의 부부사랑이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배우자의 다른 점을 나에게 맞게 바꾸려 하지 말라.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배우자의 다른 점을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다른 점이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는 유익이 된다고 믿는다. 부부사이가 돕는 베필이라면 서로 사생활,취미 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부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보여준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대할 때 주께 대하듯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며 부부 사이의 헛점과 실수를 용해시켜버린다.
배우자에 대해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배우자가 어떤 상처를 갖고 있으며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배우자가 가끔 나에게 버럭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일 때 대부분은 궁극적으로 나에 대한 불만이 아니다. 그 현상 뒤에 있는 본질을 봐야 한다. 배우자의 심령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삶의 애환과 트라우마를 보도록 노력하라.
결혼생활을 행복을 위해 했던가. 그런데 많은 경우 행복을 못 느끼는 이유는 첫 단추가 잘못 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단추란 바로 자신과 배우자에 대한 비중이다. 배우자에게 먼저 비중을 두라. 배우자의 행복을 위해 부부생활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도 행복이 온다는 이 원칙은 성경의 진리이다.
배우자와 대화할 때, 먼저 눈을 보라. 눈은 말과 행동보다 그 사람의 진실을 확연히 보여준다. 배우자가 무슨 의도로 얘기하는지, 무엇이 힘들어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눈을 보면 안다. 그리고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말의 억양, 감정조절을 먼저 생각하라. 격앙된 말투 한마디는 배우자에게 평생 상처를 심어줄 수 있고 그것은 본인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부부는 다르면서도 한 인생을 같이 산다. 부부가 두 인생을 산다면 이미 부부가 아니다. 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가치관의 조화를 말한다. 서로 다른 곳에 있고 다른 일을 할찌라도 가치관과 삶의 방향이 같다면 한 삶을 사는 것이다. 특히 한 신앙을 갖기를 바란다. 신앙이야말로 부부의 다른 점들을 하나의 의미로 엮어줄 수 있는 원동력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흠이 없거나 같아서가 아니다. 서로 부족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배려요, 희생이며 이해하는 것이다. 부부가 살아야 가정이 살고, 자녀,교회가 사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적 희망의 초석이다.
지금 배우자를 보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신 또 다른 나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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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이해”

“역사관은 편견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역사기록이 정치적 승자의 기록이기에 후세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오도할 수 있다는 말일게다.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기록했다 해도, 그 사실을 잘못 해석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현세에서도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전문가가 아니라면, 많은 편견과 오해를 가질 수 있다. 하나의 팩트(Fact)가 사람의 삶의 배경,사고의 틀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존중해야 하되, 본래의 의미를 벗어난 다양성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이질감과 갈등을 일으킨다.
편견은 정확한 사고와 이성적 논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착화된 무의식과 상대방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돌출된 것이며, 다수의 정형화된 사고의 틀에 지배받는 경우에 나타난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들이 그럴 수 있으며 그 편견을 평생 진리로 사수하며 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편견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그르치게 하고 대인관계를 원만치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잘못된 운명으로 이끌기도 한다.
가령, 국군의 날이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낙하 전에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리면 낙하할 때 죽을 수도 있다는 징크스가 있다. 그럴 때는 대개 열외시켜 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열외 없기를 명령받았는데, 한 공수부대원이 숟가락을 떨어뜨린 것이다. 설마라는 생각으로 비행기에 올라 낙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원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겁에 질려 차고 뛰어내리지 못한 결과, 프로펠러에 끼어서 사망하였다. 이 사람을 죽게 한것은 숟가락을 떨어뜨렸기 때문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노인문제를 생각해보자. 흔히 “노인들은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노인에게 일자리를 안주면 무능력해진다. 흔히 자녀들이 그렇게 만든다. “부모에게 일시키면 남들이 나를 뭐라 할까?”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또 한 예는 제주도 사람들은 투박하고 억센 사투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제주도는 바람이 세게 불기 때문에 억센 억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역감정도 그와 유사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편견을 이해로 바꾸려면, 자아개념(Self-Concept)이 필요하다. 자아개념이란 자신의 특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체제화(System)된 내적, 개인적 생각이다. 다시 말해 주체성있게 자신에 대한 관점을 갖는 것이다. 옳바른 이해는 사회의 다양성을 고려하면서도 주관적이고 독창적인 관점을 갖을 때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아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은 신앙의 눈 안에서 자아개념을 가져야 한다. 요9장에 나오는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냐?”고 제자들이 던진 질문은 일반적인 생각, 즉 편견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눈(차원)에서 해석하셨다. 욥에 대해 편견을 가졌던 세 친구들도 하나님의 눈에 의하여 지적을 받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사물과 상황을 볼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믿음이다.
편견을 이해로 바꾸기 위해서는 첫째, 장기적이고 긴밀한 사고의 훈련이 요구된다. 상대방을 충분히 사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해 절대 평가하지 말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많은 시간의 훈련과 깊은 연구, 총체적인 경험 없이는 편견을 없애나갈 수 없다. 둘째, 상호협력적이고 의존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는 제 3의 문제를 놓고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지라.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짜맞추고 협력하는 시간들을 가지라. 서로 생각을 맞추다보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셋째, 동등한 위치에 서라. 부모와 자녀, 선생과 제자, 학력과 나이, 인종에 대한 차별를 갖는다면 절대 편견에서 자유할 수 없다. 선지식이 편견을 가져올 수 있으니, 상대방의 의견과 나의 의견을 동급으로 생각하라.
사회의 모든 갈등은 편견에서 많이 비롯되지 않던가. 이해하고 공감하며 다양성 속에서도 순응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자아개념을 가진 성숙된 신앙인이 될 것이다.

“목회상담적 설교의 필요성”

2005년 9월 18일¸ 100주년 기념관에서 <기독교사상>주최로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는 주제로 심포지움이 열렸는데, 이 때 여러 대학 교수들은 한국의 저명한 설교자 16인의 설교를 분석하였다. 이 내용들 중, 부정적인 요소들 중에서“개인의 욕망 채우기,”“설교로 포장된 이데올로기 주입,” “오도된 역사인식 주입,” “엘리트 주의”등, 권위적이고 지시적인 패턴의 설교에 대해 지적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민 교회 설교자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는 일방적인 지시형 설교 패턴과 신학과 교회부흥 운동에 필요한 설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설교 유형은 필요하다. 하지만 한가지 영양부족이 몸 전체의 건강을 해치듯, 편중된 형식의 설교는 청중에게 진정한 치유와 신앙을 심어주지 못할 것임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필자가 목회상담적 설교에 대한 담론을 거론하는 이유는 설교자가 성경의 Context를 통해 청중의 Context에 대한 재해석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설교를 통해서 청중의 경험에 의한 그들의 감정,사고,상처 등이 성경과 공감을 이루고 그 공감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청중은 설교와 자신의 영적,정서적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가로 유명한 포시딕(Harry E. Fosidick) 목사는 “나의 목회의 핵심은 설교라기보다 상담이다. 나의 설교는 집단상담이다. 모든 설교는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과 깊이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심리적으로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의 문제 속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목회상담적 설교는 전인 치유를 위해 매우 필요한 것이다. 상담으로 교인들에게 다가가는 설교는 그들의 욕구를 영적, 정신적으로 채워줄 수 있다. 나아가 머슬로우(A. Maslow)가 말하는 최고 상부 단계인 자아실현까지 성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목회상담적 설교는 교인들의 Context 속에 Text를 적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게 하며 성경 속에 나타난 Context를 공감하도록 하는 효과를 낳게 한다. 이는 하나님과 이웃(사회), 나(영,혼,몸)를 만나고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전인 치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청중의 필요와 아픔을 알아야 하고 그들의 정황(Sitz im Leben)을 파악해야 하며, 그 이해를 가지고 성서의 텍스트를 전할 때 성육신의 설교가 될 수 있다. 목회상담적 설교는 개인상담과 유사한 특징이 있으나 집단응집력, 모방행동 등을 통한 기법이 다른 점이다. 설교를 상담기법으로 하되, 청중전체의 공통된 정서와 더불어 개인의 특이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전자와 후자를 자료로 삼아 성경의 Context와 Text를 사용할 수 있다.

설교자가 목회상담적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세들이 있다. 1)설교자의 자기노출(Self-Disclosure)을 적절히 하라 2)대화하듯 하라 3)청중과 개인의 삶의 자리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라 4)정신분석학과 상담적 지식을 성경에 적용하라 5)청중 앞에서 한 사람과 얘기하듯 하라 6)설교시 가끔 질문을 던지라. 이때 청중이 생각할 수 있도록 몇초간 침묵하라. 반드시 답을 들을 필요는 없다. 필자는 시애틀 전역에 있는 교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설문에 응한 피면접자들 중에 과반수 이상이 목회상담적 설교를 원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지시형보다는 상담형 설교를 더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피면접자들의 선호가 반드시 설교의 이상적 모델이란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들의 선호도를 파악하여 청중의 Need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필자의 역점은 성경이 지시적이고 일방적인 메시지와 함께 목회상담적 설교에도 비중을 많이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설교가 설교자의 기호성향이나 청중의 선호도와는 상관없이 성경적 설교의 패턴을 적용해 청중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하고 상처로 인한 정서적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기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교회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