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변함”에 대한 제언

요즘 “변화는 있고 변함은 없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변화(Transformation)와 변함(Changing)이란 단어는 사물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시각에 따라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의 개념을 갖고 있다. 모든 자연은 계절에 따라 색깔과 풍경이 변화한다. 변화는 그 기후에 따라 적응하며 생존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속성과 본질은 변함이 없다. 그러기에 변화가 있는 것은 순리이지만 변함이 있다면 역리요, 모든 질서의 역행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스스로 변함을 택하므로 결국 죄에 빠진 운명으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변화되어야 한다. 변화는 있고 변함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삶으로 변화하면서 변함이 없는 삶을 이룰 수는 없을까. 꾸준한 변화가 없다면 결국 변함이 있는 신앙인이 되고 만다. 다시말해 신앙성숙이란 무엇인가. 변함이 없도록 변화하는 것이다.
필자가 사역을 해오면서 많은 교회가 갖고 있는 맹점과 신학적, 행동적 오류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 것은 한마디로 변화를 억제하는 신학적 기류와 신앙관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번 얻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계속적인 변화의 삶이 무시된다면 성경에 나타난 은혜로 받은 구원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는 말씀은 현재진행형의 의미이다. 이미 얻은 구원과 지금 얻고 있는 구원, 앞으로 얻을 구원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앙인은 변함없는 구원을 위해 변화되어 나가야 한다. 삶의 계속적인 변화가 없다면 이미 얻었다고 하는 구원에 대해 변함이 없는가를 한번 의심해보라.
독자는 자신이 이미 구원얻은 하나님의 자녀로 믿는가. 그렇다면 교회의 직책이나 사회의 직분자로 사는 데에 몰두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사회의 성공을 위해 직책에 혈안이 되어있지 않은가. 직책을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려 한다. 신앙인도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지고 신앙의 척도로 삼으려 한다면 그 직분이 구원의 믿음을 조롱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목사나 장로, 집사 권사를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직분이나 사회의 타이틀 이전에 하나님이 빚으신 사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계속적으로 변화하라. 가시적이고 환경적인 변화가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자신으로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변함없는 변화는 이미 얻은 구원의 신앙과 함께 구원을 날마다 체험하는, 즉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구원이 임하는 과정의 삶의 표현이다.
결론적으로 변화가 있어야 변함이 없다. 중단없는 변화야말로 교회를 혁신하는 것이며, 자신 뿐 아니라 가정, 사회가 살 맛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정치적 개혁, 경제부흥, 잘 짜여진 사회보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의 변화에서 온다. 주변에 사람답게 사는 모습들에서 느껴진다. 이것이 우리모두를 위한 변화의 필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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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 행동을 조절하라”

지난 20C 정신분석학의 초석을 놓았던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Freud)는 <꿈의 해석>,<히스테리 연구> 등, 그의 저술에서 임상실험을 통한 인간의 무의식 세계의 비중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그의 연구는 오늘날 정신분석학에 주요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간의 행동과 말, 꿈, 감정 등이 프로이트의 말처럼 대체로 무의식에서 오는 것이라면, 인간의 운명도 무의식이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살아오면서 본인 뿐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어떤 역동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음을 인지해 왔다. 그 역동이란 예를 들면, 히스테리 현상, 강박증, 정신분열 현상 같은 것들이다. 이런 현상들은 망각, 공포, 대인기피증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신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1950년대에 출판된 프로이트의 책에서는 정신질환적 병리현상들을 과학적인 연구,즉 뇌의 연구를 통해 치료를 연구한 바가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총괄된 정신질환연구의 뿌리는 바로 ‘무의식’에 대한 것이다. 무의식은 어렸을 때부터 겪은 경험에서 온다. 무의식 작용이 제일 원활한 때가 꿈을 꿀 때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Carl Jung)도 꿈에서의 무의식 활동을 연구하였다. 그는 말하길, “꿈은 무의식과 이어지며 어떤 보상작용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도 언급하길, “꿈은 숙제에서도 오며, 그 숙제는 무의식을 자료로 삼는다.”고 말한다.
숙제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성취하지 못해 늘 고민거리가 된 어떤 무엇이다. 예를 들어 젊었을 때 사업에 실패하고 그것이 한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그 한이 무의식에 남아 꿈으로 사업성공을 이루려고 한다. 사업에 성공하는 꿈을 꿀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사업실패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온갖 변형된 현상으로 무의식과 꿈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나쁜 감정이 묻어있는 무의식에 의해 사람의 의식은 물론, 평상시의 말과 행동, 감정이 비상식적인 현상으로 돌출되는 것이다.
오늘날 정신의학자들에 의하면 보통 대화할 때나 쇼핑할 때, 또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심지어 판사가 판결할 때도 무의식이 그 사람의 결정에 때로 80%정도의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갑자기 튀어오르는 상한 감정, 기억은 없어도 왠지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불쾌한 기분은 거의 과거의 좋지않은 경험과 그에 따른 무의식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상한 무의식이 그 사람의 대인관계와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필자가 무의식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신앙이나 모든 생활 속에서 지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을 보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말 속에는 그 사람이 본래 의도하지 않은 현상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 현상들이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고 분쟁을 일으키며 본인도 불행해지는 사례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치유의 출발점은 그 본질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는 것은 현상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선 자신을 치유해나가도록 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행동과 말이 상대방과 공동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거나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면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라. 자신의 어떤 무의식의 감정이 있는지 말이다. 그것은 자유연상을 통해 가능하다. 자유연상이란 나쁜 감정을 추적해가는 것이다. 떠오르는 단어들을 적어보라. 둘째,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부정적 감정이 어떤 경험에서 왔는지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나쁜 기억을 긍정적인 기억으로 바꾸라. 예를 들면, 부모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있다면 부모를 이해하도록 하고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경험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라. 셋째, 평소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낼 때 한번 템포를 늦추라. 과연 이 말이 상식적이고 옳은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감정에 의한 즉각적인 말과 행동은 좋지 않은 무의식 작용이 많기에 실수가 다반사이다. 넷째, 자아상 안에 있는 나쁜 이미지보다 좋은 이미지를 많이 심도록 노력하라. 자신의 장점과 좋은 경험들, 어려움 속에서 견뎌온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 그리고 상처많은 자신을 보듬어주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의식적 노력이 무의식을 바꿀 수 있다. 좋은 무의식은 보존하되, 안좋은 무의식은 언제든지 신앙과 노력으로 변화가 가능하다. 그래야 행복해진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 그래야 이웃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이 생기고 자신은 평안을 경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