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이해”
“역사관은 편견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역사기록이 정치적 승자의 기록이기에 후세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오도할 수 있다는 말일게다.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기록했다 해도, 그 사실을 잘못 해석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현세에서도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전문가가 아니라면, 많은 편견과 오해를 가질 수 있다. 하나의 팩트(Fact)가 사람의 삶의 배경,사고의 틀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존중해야 하되, 본래의 의미를 벗어난 다양성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이질감과 갈등을 일으킨다.
편견은 정확한 사고와 이성적 논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착화된 무의식과 상대방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돌출된 것이며, 다수의 정형화된 사고의 틀에 지배받는 경우에 나타난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들이 그럴 수 있으며 그 편견을 평생 진리로 사수하며 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편견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그르치게 하고 대인관계를 원만치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잘못된 운명으로 이끌기도 한다.
가령, 국군의 날이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낙하 전에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리면 낙하할 때 죽을 수도 있다는 징크스가 있다. 그럴 때는 대개 열외시켜 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열외 없기를 명령받았는데, 한 공수부대원이 숟가락을 떨어뜨린 것이다. 설마라는 생각으로 비행기에 올라 낙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원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겁에 질려 차고 뛰어내리지 못한 결과, 프로펠러에 끼어서 사망하였다. 이 사람을 죽게 한것은 숟가락을 떨어뜨렸기 때문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노인문제를 생각해보자. 흔히 “노인들은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노인에게 일자리를 안주면 무능력해진다. 흔히 자녀들이 그렇게 만든다. “부모에게 일시키면 남들이 나를 뭐라 할까?”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또 한 예는 제주도 사람들은 투박하고 억센 사투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제주도는 바람이 세게 불기 때문에 억센 억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역감정도 그와 유사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편견을 이해로 바꾸려면, 자아개념(Self-Concept)이 필요하다. 자아개념이란 자신의 특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체제화(System)된 내적, 개인적 생각이다. 다시 말해 주체성있게 자신에 대한 관점을 갖는 것이다. 옳바른 이해는 사회의 다양성을 고려하면서도 주관적이고 독창적인 관점을 갖을 때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아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은 신앙의 눈 안에서 자아개념을 가져야 한다. 요9장에 나오는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냐?”고 제자들이 던진 질문은 일반적인 생각, 즉 편견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눈(차원)에서 해석하셨다. 욥에 대해 편견을 가졌던 세 친구들도 하나님의 눈에 의하여 지적을 받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사물과 상황을 볼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믿음이다.
편견을 이해로 바꾸기 위해서는 첫째, 장기적이고 긴밀한 사고의 훈련이 요구된다. 상대방을 충분히 사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해 절대 평가하지 말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많은 시간의 훈련과 깊은 연구, 총체적인 경험 없이는 편견을 없애나갈 수 없다. 둘째, 상호협력적이고 의존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는 제 3의 문제를 놓고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지라.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짜맞추고 협력하는 시간들을 가지라. 서로 생각을 맞추다보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셋째, 동등한 위치에 서라. 부모와 자녀, 선생과 제자, 학력과 나이, 인종에 대한 차별를 갖는다면 절대 편견에서 자유할 수 없다. 선지식이 편견을 가져올 수 있으니, 상대방의 의견과 나의 의견을 동급으로 생각하라.
사회의 모든 갈등은 편견에서 많이 비롯되지 않던가. 이해하고 공감하며 다양성 속에서도 순응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자아개념을 가진 성숙된 신앙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