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 소망
근대교회사의 대가 라투레트는 말하길, “인류의 만성적인, 인간의 무지와 우둔함과 이기심과 교만의 결과인 여러 악덕이 기독교 세계 안에서 놀랍도록 나타났으나 기독교인들은 성육신과 십자가의 부활과 성령을 통해 새로운 활력소를 경험한다.”고 말했다. 세계는 고통과 모순으로 쌓여 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삶은 보람과 도전이 있는 것이고, 거기서 진리와 사랑은 그 힘을 확장할 수 있는 대상 지역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19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공포 속에 휩싸여있다. 그 뿐인가. 각종 재해와 오염,인간성 상실 등 인류 역사가 흘러오면서 점차 인간이 설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고통과 아픔에 시달릴수록 진리와 평화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을……. 그러기에 절망 속에 소망이 있으며 모순 속에 진리가 있고 분쟁 속에 평화가 있는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것이 오히려 의미를 부여하며 역사의 이중성 속에 하나의 맥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는 말씀은 이 점을 실증하는 것이다. 세속사와 구속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인류의 하나된 역사이다.
기독교회가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로서 다른 종교와 뒤섞여 성장해왔으며 어느 경우에는 세속사 속에 만연한 사회악과 구조악보다도 한층 더 오염되고 타락한 역사를 보여왔다. 교회 안에서의 비리와 지도자들의 타락, 분쟁 등은 어찌보면 무종교인들의 가르침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복음전도의 기회를 오히려 교회가 막고 있는 꼴이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참된 기독교의 진리, 즉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과 소망을 던져주는 곳은 역시 교회이다. 악 속에 선이 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을 알수록 소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 절망은 오히려 우리에게 득이 된다고 본다. 악을 방조하거나 미화하는 것이 아닌, 악의 존재를 의식하고 밀쳐내면서 나의 존재를 반추해본다면 신앙과 양심을 통한 선의 모습이 그려진다. 악 속에서의 절망이 새로운 탈출구를 찾게 하며 소망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이 세계와 민족, 사회, 개인에게 만연하고 있는 절망적 의식 속에 뿌리를 내려왔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외치고 싶다. “철저히 절망하라”고….”그러면 복음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절망이란 불평이나 포기가 아닌, 잘못된 현상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절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새롭게 창조되는 소망도 모른다. 악을 모르는 사람은 선을 알 수도 없다. 문제의 환경 속에서 그래도 좋게 여겨보려는 어설픈 소망은 그야말로 끝없는 절망을 낳는다. 기독교의 참다운 절대적 소망은 절대적 절망에서 온다. 인류역사와 성경의 역사 속에서 악의 경륜 사용이 그만큼 구조적이란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의식이나 인식이 기독교의 성서적 교훈의 핵심과 별개가 아니란 사실을 짚고 지나가야만 한다. 기독교의 핵심은 요컨대 <사랑>에 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그 사랑이다. 공격적인 인격들이 나를 해하려 할 때 그 대상을 사랑하라. 사랑과 감사는 그 악이 나에게 득과 소망이 된다는 믿음에서 온다.
혹시 개인적으로 절망 중에 있다면, 절망을 준 요소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라. 왜냐하면 그런 요소들이 소망의 요소들을 불러올 것이니 말이다. 예수그리스도는 그 분의 절망적인 삶을 통해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그 분의 세상에 대한 눈은 소망이 아니었다. 세상이 절망적이기에 진정한 소망을 위해 오셨다. 우리에게 그 믿음이 있다면 삶 속에 나타나는 절망이 절망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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