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 소망

근대교회사의 대가 라투레트는 말하길, “인류의 만성적인, 인간의 무지와 우둔함과 이기심과 교만의 결과인 여러 악덕이 기독교 세계 안에서 놀랍도록 나타났으나 기독교인들은 성육신과 십자가의 부활과 성령을 통해 새로운 활력소를 경험한다.”고 말했다. 세계는 고통과 모순으로 쌓여 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삶은 보람과 도전이 있는 것이고, 거기서 진리와 사랑은 그 힘을 확장할 수 있는 대상 지역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19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공포 속에 휩싸여있다. 그 뿐인가. 각종 재해와 오염,인간성 상실 등 인류 역사가 흘러오면서 점차 인간이 설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고통과 아픔에 시달릴수록 진리와 평화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을……. 그러기에 절망 속에 소망이 있으며 모순 속에 진리가 있고 분쟁 속에 평화가 있는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것이 오히려 의미를 부여하며 역사의 이중성 속에 하나의 맥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는 말씀은 이 점을 실증하는 것이다. 세속사와 구속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인류의 하나된 역사이다.

기독교회가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로서 다른 종교와 뒤섞여 성장해왔으며 어느 경우에는 세속사 속에 만연한 사회악과 구조악보다도 한층 더 오염되고 타락한 역사를 보여왔다. 교회 안에서의 비리와 지도자들의 타락, 분쟁 등은 어찌보면 무종교인들의 가르침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복음전도의 기회를 오히려 교회가 막고 있는 꼴이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참된 기독교의 진리, 즉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과 소망을 던져주는 곳은 역시 교회이다. 악 속에 선이 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을 알수록 소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 절망은 오히려 우리에게 득이 된다고 본다. 악을 방조하거나 미화하는 것이 아닌, 악의 존재를 의식하고 밀쳐내면서 나의 존재를 반추해본다면 신앙과 양심을 통한 선의 모습이 그려진다. 악 속에서의 절망이 새로운 탈출구를 찾게 하며 소망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이 세계와 민족, 사회, 개인에게 만연하고 있는 절망적 의식 속에 뿌리를 내려왔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외치고 싶다. “철저히 절망하라”고….”그러면 복음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절망이란 불평이나 포기가 아닌, 잘못된 현상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절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새롭게 창조되는 소망도 모른다. 악을 모르는 사람은 선을 알 수도 없다. 문제의 환경 속에서 그래도 좋게 여겨보려는 어설픈 소망은 그야말로 끝없는 절망을 낳는다. 기독교의 참다운 절대적 소망은 절대적 절망에서 온다. 인류역사와 성경의 역사 속에서 악의 경륜 사용이 그만큼 구조적이란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의식이나 인식이 기독교의 성서적 교훈의 핵심과 별개가 아니란 사실을 짚고 지나가야만 한다. 기독교의 핵심은 요컨대 <사랑>에 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그 사랑이다. 공격적인 인격들이 나를 해하려 할 때 그 대상을 사랑하라. 사랑과 감사는 그 악이 나에게 득과 소망이 된다는 믿음에서 온다.

혹시 개인적으로 절망 중에 있다면, 절망을 준 요소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라. 왜냐하면 그런 요소들이 소망의 요소들을 불러올 것이니 말이다. 예수그리스도는 그 분의 절망적인 삶을 통해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그 분의 세상에 대한 눈은 소망이 아니었다. 세상이 절망적이기에 진정한 소망을 위해 오셨다. 우리에게 그 믿음이 있다면 삶 속에 나타나는 절망이 절망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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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 속에 행복

       “모든 것은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작은 것을 무시하고 큰 것부터 얻으려는 경우가 많다. 순리보다 역리를 택하는 것은 이기심과 탐욕의 발로이다. 큰 것을 얻으면 자신이 크게 보여서 타인에게 존경받고자 함이 아니던가. 무조건 큰 것을 얻고 명성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이성이나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체면 문제이다. 다시말해 그 사람이 믿는 진리나 이상보다 그 사람을 훨씬 더 지배하고 있는 본성적 욕구이다. 즉 존경받고 싶은 욕구이다.

어떤 교수가 여러 곳을 다니며 ‘인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의하고 다녔다. 그는 다니면서 학벌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행복과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학교 평등화를 주장하고 만인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강의는 꽤 설득력을 얻어 많은 추종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아들이 일류대학에 실패하자 아들에 대한 질책이 가관이었다. 바로 그 사람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내면의 욕구 때문인 것이다.

보통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그 행복의 길을 가지 않는다. 주변에 많은 이목과 체면문화에 휩쓸려 자신의 중대한 인생의 결정을 세상이 정해놓은 흐름에 맡겨버린다. 즉 성공의 조건이라는 것들 속에……. 독자에게 묻고 싶다. 진정한 행복이 평범하고 작은 보람에서 오는 것임을 알면서도, 왜 자꾸 주변을 의식하여 행복해지지 못하는지를…..필자는 생각하길, 그 이유는 인간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외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함께’라는 의식 때문에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회의 그릇된 편견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일명, ‘사회적 Secret’이라고 부르고 싶다. 알면서도 옳은 것을 묻어두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이 아닌 타인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에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변장된 삶인 것이다. 마치 이것은 서커스에서 온갖 우스꽝스러운 연출을 하는 삐에로의 모습이 아닌가.

삐에로의 탈을 벗어야 한다. 행복감이란 자신을 찾는데서 온다. 주변의 어떤 문화,편견,사상이든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삶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면서도 자신이 확신하는 옳바른 삶의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누가 어떻게 보든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과감히 가라. 작은 것 속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대로 그렇게 살라. 설사 큰 것을 얻었어도 큰 것 속에 작은 것을 보라. 명성을 얻었어도 그 속에 작은 나를 찾도록 노력하라. 큰 것은 거품과 허세가 많지만, 작은 것에는 진정성과 생명이 있다. 비범함에는 그 기능성에 주목을 받지만, 평범함 속에는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의 그리스도는 결코 큰 것을 추구하는 분이 아니었다. 작은 사람, 작은 마을을 찾아다니시고 소외되고 불우한 이웃에게 눈을 돌리셨다. 그 분의 활동영역도 그리 넗은 지역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 분은 크신 분이 아니시던가. 여기서 ‘크다’는 의미는 가시적이고 허풍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닌, 진실의 풍성함을 말한다. 독자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처해있는 그 장소, 그 상황이 작고 보잘 것 없이 보일찌라도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먼 곳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장소를 보라. 때로는 힘들어도, 그래도 내가 사는 의미와 보람이 내가 있는 곳에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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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욕구로 사는가

미국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머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단계로 나누었다. (1) 생리적 욕구,(2)안전의 욕구,(3)소속감과 애정의 욕구,(4)존경의 욕구,(5)자아실현의 욕구이다. 피라밋을 연상해서 (1)부터 (5)까지를 밑에서부터 층계별로 생각해보라. (1)에서 (4)까지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갖는 욕구이면서 행복의 조건으로 삼는다. (5)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만이 갖는 욕구이다. 자아실현의 욕구란 자아의 의미를 찾고 이웃을 향한 관심을 갖는다.

자아실현을 성취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1)부터 (4)까지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5)를 행하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1)부터 (5)까지의 욕구를 모두 채우며 살아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에게는 어떤 욕구를 채워야 행복을 느낄까? 필자는 독자에게 묻고 싶다. 지금 어떤 욕구를 채우고 싶은지? 사실 인간의 존재란 어떤 욕구를 채워도 만족함이 없는 존재이다. 아무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마음의 공허감와 위축감은 씻을 수 없다. 그나마 자아실현의 욕구를 채우며 사는 것이 조금이나마 행복을 찾으며 산다고나 할까.

필자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심적인 적막함과 공허가 끊임없이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인지해 왔다. 다시말해 무엇을 얻었든, 못얻었든 간에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다섯가지 욕구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어떤 욕구 속에 충족함을 주시려고 하지 않으셨겠는가. 세상에 살면서 어떤 성취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그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이 무엇일까? 종교일까? 종교란 인류역사 이래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욕구이긴 하다. 그러나 필자는 종교 생활 그 자체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믿는다.

필자는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진정 인간이 추구해야할 한 가지 욕구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참 인간됨을 느끼며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된 나의 모습을 찾으며 사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아무리 어떤 욕구, 나아가 남을 돕고 사랑을 베푸는 욕구를 채워도 행복해질 수 없다. 나 자신이 인간으로서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Doing’이 아니라 ‘Being’이다. 나의 현주소와 나의 본 모습을 보며 나를 찾는 삶이 없으면 인간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필자는 자신의 모습을 찾는 비결은 오직 기독교 신앙 밖에는 없다고 믿는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종교가 아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마땅히 믿고 따르는 인간의 가장 기초적이고 전부인 삶이다. 장로교 창시자 존 켈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집’에서 말하길,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러면 내가 보이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하라. ‘왜 내가 그런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왜 나는 공허감을 느끼는지, 또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이 무슨 목적으로 나를 세상에 나오게 하셨는지? 과연 나는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를 확고히 알고 산다면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신앙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만들고 목자인 그리스도를 통해 위안과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 신앙생활이란 내 인생의 주인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다. 주인이 없는 인생은 방황할 수밖에 없고 안정감이 없다.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세상의 정치, 경제문제, 민족과 사회, 교회의 모든 상황을 보고 에너지를 쏟기 전에 그 에너지로 자신을 먼저 보라. 그래야 세상에 대한 눈이 열릴 것이다. 상담:206 992 8625

쓴 뿌리를 제거하라

필자가 그동안 삶을 살면서 제일 힘들다고 느낀 것은 역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사람마다 특출나면서도 독특한 부분들을 몇가지 이상씩은 가지고 있다. 장점과 단점이 있겠지만, 특히 단점에 대한 면들이 사람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다. 가족 관계에서도 그 갈등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부부가 생각이 다르고 부딪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 속에서의 사람 관계는 오죽하랴. 단지 견해 차이나 생각의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난 성격과 상식 밖의 돌출된 말과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안다. 상대방의 생각과 상황을 고려하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여 말과 행동을 잘 나타내지만 어떤 이들은 내면에서 파생된 말과 행동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 내면이란 무의식을 말한다. 무의식은 의식적인 행동을 지배한다. 평소에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것의 80%가 무의식에서 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 무의식에 형성된 여러가지 뿌리가 있다. 그 뿌리는 어렸을 때부터 경험한 상처라는 씨앗에서 나온다. 즉 실패와 슬픈 환경에서 오는 씨앗이다. 여기에 열등감, 자괴감 등이 뒤섞여 있다.

그 사람의 타고난 기질과 연합하여 조성되는 성격은 결국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기에 부정적인 무의식은 곧 그 사람의 모난 성격이 되고 만다. 이것이 쓴뿌리이다. 사람의 쓴뿌리는 그 사람의 운명을 그르치게 하는데 평생을 쓴뿌리를 지닌채 산다면 그 사람의 건강과 대인관계 회복은 요원할 것이며 결국 신앙 생활에도 막대한 폐해가 발생한다. 어떻게 쓴뿌리를 제거할 것인가. 필자는 이에 대해 여러방면으로 연구해 왔고 경험해 왔다. 필자도 쓴뿌리가 있기에 목회나 대인관계에서 여간 불편을 느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관심을 갖고 노력하면 어느정도 쓴뿌리를 제거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자신과 사람들의 행동과 말 자체에만 귀 기울이면 안된다. 현상 뒤에는 본질이 있슴을 알라. 다시 말해, 왜 나 자신이나 상대방이 그런 말을 하고 행동을 했는지 그 원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의 원인은 그 사람의 쓴뿌리이다. 즉 그 사람 자신의 문제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이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있는 상처에 의해 자신이 지배받고 있다는 것만 평소에 알아도 조금씩 개선해 나갈 수 있다. 먼저 상처로 얼룩진 자신을 이해하고 화목하라. 잘 견디어 온 자신에 대해 칭찬해주고 자신감을 가지라. 상처와 응어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것을 재해석하는 일은 가능하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연단이며 내게 필요했던, 그래서 신앙을 갖기 위한 과정의 결과였슴을 인지하는 훈련을 가지라. 의식적인 노력이 무의식을 바꿀 수 있다.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면, 반대로 의식이 무의식을 지배할 수 있다. 관건은 내 자신이 어느 중심에 서 있느냐이다. 이것은 신앙을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상처의 뿌리는 남아있지만, 그 뿌리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건강한 뿌리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며 자신을 컨트롤할 줄 알고, 상대방도 이해하게 되어 상대방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신앙이란 나자신을 먼저 다스리는데서 나오지 않는가. 자신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시간을 투자하라. 모든 일보다 자신의 회복과 삶의 의미를 두고 사는데에 인생의 목적을 두라. 그것이 후회없는 삶이 아니던가. 상담:206 992 9625

어린아이의 마음

사람들은 대체로 코메디 방송을 좋아한다. 개그맨들의 어린아이같고 익살스런 모습에 한바탕이라도 웃고 나면 마음의 응어리가 잠시라도 녹아내리기 때문일까. 인간은 어린아이로 살다가 어른이 되면서 천진난만하고 꾸밈없는 모습이 사라져가고 꾸미고 눈치보며 거짓된 ‘페르조나(가면)’에 의지해 사회를 적응해가려고 한다. 행동심리학에서 행동으로 인한 심리적 변화를 말하듯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환경에 따라 행동을 하므로써 마음까지도 페르조나와 동화되고 만다.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심령이 메마르고 감성이 무디며 표리부동한 자세로 일관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인간으로서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꾸미는 인격은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쇠고랑에 채우고 자기 표현을 못하게 한다. 참 자기가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적개심과 신경이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를 표현 못하기에 성급해지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다. 지나치게 조심하며 심하게 자신을 비판한다. 예민한 사람은 실패의 경험을 많이 한다. 영국의 조사기관에서 연구한 ‘목적진전’이란 말이 있다. 예를 들면, 바늘 귀에 실을 꽂을 때 손이 떨리는 현상인데, 떨어져 있을 때는 떨리지 않는 것이다. 왜 말을 더듬는가? 실수 안할려고 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이루려고 지나치게 신경쓰면 떨리고 능률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이 모든 심리는 완벽주의와 꾸밈에서 온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건강해질 수 있다. 예수님도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설파하였다. 어린아이는 속임수가 없으며 천박함이나 위선이 없다. 순수한 감정과 행동을 나타낸다. 실수를 해도 개의치 않는다. 여기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인간의 참모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거짓모습은 꾸민 모습아닌가. 그러기에 어른이 되면서 페르조나를 가끔씩 벗고 참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 참된 모습이란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상처나 자아발견의 욕구 등이다. 현실을 지혜롭게 대처해나가면서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을 찾고 자유와 환의를 느끼면 창의력과 에너지가 배로 증가되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놀이문화이다. 놀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하다. 필자는 며칠전 교인들과 함께 윷놀이를 하였다. 그 때 어린아이처럼 웃고 함성도 질렀다. 목사라는 타이틀이 내면의 욕구를 억제하게 할 수 있겠는가. 교인들을 어느 선에서는 전혀 의식할 이유가 없다. 점잖치 못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나의 교인들은 알고 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며 참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영성은 바로 여기서부터 나온다.

필자가 지난 컬럼에서도 언급했듯이, 영성이란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꾸밈이나 페르조나가 아니다. 어린아이처럼 실수를 두려워 말라. 타인을 너무 의식하여 자신을 늘 비판하고 억압하는 삶에서 벗어나라. 때로는 말을 크게 하고 주변사람들의 말에 상처받지 않는 훈련을 스스로 하라. 자신의 신경계를 이완시키고 가끔씩 무디어져서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하라. 단 하루를 살더라도 기쁘고 평안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담:206 992 9625

“사회적 동조현상을 분별하라”

요즘 사회적 동조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유행이나 호감, 정치, 직업, 취미 등 타인이나 다수의 행동과 사고 방향이 한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현상은 정확한 사고의 판단이나 주관적 해석, 개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 동조현상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심리적 동조현상이란 다소 부정적인 표현으로 자신만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그릇된 사회적 심리에 따라 동화되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동조현상은 비슷한 나이나 학벌, 같은 지역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에는 감정, 잇권, 분위기가 한 몫을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반응이 그릇된 것이라면 냉철한 판단으로 회피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날 안타까운 사실이다. 미국 어느 기관에서 어른 10명으로 실험하였다. 1명은 모르게 9명에게 입을 맞추게 하였는데, 내용은 L.A에서 뉴욕보다 시카고가 더 멀다는 것이었다. 10명을 둘러앉게 한 다음에 인도자가 질문을 던졌다. “L.A에서 뉴욕과 시카고 중 어디가 더 머냐?”라고 했더니 사전에 약속한 대로 9명은 시카고가 더 멀다고 하였다. 놀라운 것은 나머지 1명도 엉겁결에 “시카고가 더 멀다.”고 하였다.

필자가 사는 지역에도 보면, “어느 교회가 좋다더라.”라고 소문이 나면 그 교회가 갑자기 양적으로 부흥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한국인들의 사회적 동조현상은 어느 민족보다 심하다는 것을 느낀다.  원인이야 있겠지만 하나의 그 민족의 정서와 습성(Ethos)이 아니겠는가. 어떤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판단보다는 사상적 편의주의에 입각한 감정과 단순함이 잘못된 개인과 집단의 행동을 낳는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집단을 이루어 때로 폭력을 불사하기도 하는데 급기야 그들의 주장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으며 타협의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다. 감정에 따라 인지적인 것도 바뀌기 때문이다.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며 자기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그룹들과 함께 끊이지 않는 적대세력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필자가 언급한 것처럼, 흑백논리는 인간의 사고를 단순화시키며 감정 또한 격하게 만든다. 타협과 대화를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하고 전혀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이지도 못하다. 우리 주변으로 밀물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소식들이 있다. 특히 정치 문제가 그것이다. 자신이 정치색을 갖고 있다고 할 때, 과연 그 사상이 정확한 정보와 판단에 의한 것인가.  우리가 듣고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해 과연 그 사실 그대로 내가 해석하고 판단하는가. 그 사실보다는 나의 경험과 편견, 평소 갖고 있는 감정과 상처에 의한, 편협되고 왜곡된 인식은 아닌가.

분별없는 사회적 동조현상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이 오류가 있을 수 있슴을 인지하라. 또한 자신이 옹호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 모두 장단점이 있슴을 항상 생각하라. 모든 해석과 주장에는 늘 모순이 도사려 있다. 인간은 어차피 모순의 존재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순히 어느 쪽이 절대로 옳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에겐 화해라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이 다를지라도 화해할 줄 아는 사회는 타협이 있고 대화가 가능하다. 아무리 나의 의견을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지라. 그 호감이란 상대방이 나보다 나은 면이 있슴을 인정하는 겸허한 자세에서 온다. 방향없이 흔들리는 잘못된 사회적 동조현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겸손하고 포용성있는, 자유로운 생각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과거도 바꿀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Freud)는 말하길, “일반적 슬픔은 의식적이며 슬픔의 작용이 완결된 뒤, 자아는 다시 자유롭게 되고 새로운 대상에게 리비도(Livido:정신적,본능의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가능한데, 우울증은 무의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다는 사실만 알 뿐, 그 대상을 알지 못하기에 인식적 오류에 빠진다. 우울증 환자가 표출하는 슬픔의 억제는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우울증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행동은 대체로 가정불화와 신앙생활 제약을 유발하며 모든 관계형성에 부작용을 낳는다. 자신의 내부세계를 억누르며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고 만성적인 공허감으로 인해 경계선 인격장애로도 나타난다. 경계선 인격장애란 이유없이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정서,행동,대인관계가 매우 불안정한 정신적 병리현상이다. 신경증 환자는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만, 정신증 환자는 자신의 문제를 모를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우울증 환자는 그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의식,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경험의 인자들이다. 대인관계에서 선한 대상(Good Object)의 경험이 많은 경우에는 정신병리학적 증상이 그만큼 축소되며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을 포용하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되지만 , 음가적 대상(Bad Object)의 경험이 많았던 경우에는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무의식 속에 모든 대상과 환경을 불신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요인이 작용하여  심적 기피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음가적 대상은 부모에서 시작될 수 있으며 학교와 사회에서 점차 늘어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음가적 대상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자신에 대한 억압을 해소하려는 증상을 보이기에 대인관계가 좋아질 리 없다는 것이다. 대인관계에 갈등이 많아지면 우울증이 여지 없이 찾아온다. 부부사이와 가족도 예외는 없다. 우울증은 사실 모든 정신병적 증상의 종합적 증세로서 그 뿌리가 심각한, 영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우선 자신의 우울증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탐색해 봄이 좋을 것이다. 다른 원인이 아닌, 과거에 경험했던 음가적 대상들이라면, 우선 그 대상들에 대한 인식 변화와 인지 치료가 절실하다. 가령, 그 대상이 부모님이나 어떤 환경들이었다면 그 사실에 대해 재해석과 의미를 두는 것이다.  과거의 고통이 나에게 의미있는 사건으로 다가오고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부모에 대한 이해를 가지도록 하라. 환경에 대해서도 내게 필요한 여건이었슴을 인지하라. 자신은 그 여건을 잘 견뎌왔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 때 보고 계셨으며 상처입은 치유자로 쓰시려는 목적이 있었슴을 믿으라.

‘과거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무리 아픈 상처라 할지라도 보는 의미와 해석에 따라 내게 새로운 사건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우리는 과거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히려 아픈 과거는 나를 성숙시키고 인생의 참 의미를 되새기는 자료로 삼을 수 있다. 모든 일은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만났든, 나를 위한 양약임을 늘 상고하라. 그 생각이 우리의 믿음이 될 것이며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해나갈 것이다. 

“잘못된 확신에서 벗어나라”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M.스캇펙(Scott Peck) 박사는 말하길,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악을 행한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그동안 사역을 하면서 이런 일들을 수없이 보았다. 자신의 확신으로 타인을 경멸하고 죽이는 일들이 역사적으로도 얼마나 많이 자행되어 왔던가.  기독교가 종교의 면모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반목하지 않았던가.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 사상, 철학 등 전 분야에 걸쳐 나름대로의 완전한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오늘날 그런 유토피아는 없다. 단지 갈등과 반목이 난무할 뿐이다. 이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인할 수 없다.

갈등이란 서로의 주장이 일치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그 주장이 일치되지 않는 이유로 상대방을 질시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종교의 경우 신의 이름으로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상대방을 살해하기도 한다. 확신이 우리에게 삶의 질과 역량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악의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가 평소에 가지는 종교적 확신이 과연 얼마나 정확하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방향과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사람은 다른 부분에 대해 적대적이며, 그로 인해 자기가 확신하는 부분마저도 곡해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

확신이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요, 강조될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교회에서도 설교시간에 믿음의 확신이란 말을 수없이 듣는다. 성경과 기도,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믿음의 확신 없이 가능하겠는가. 필자는 ‘확신’이란 말 자체를 좋아하고 강조하기도 한다. 확신이 있을수록 신앙인은 마음이 자유롭고 안정되며 용기가 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그 ‘확신’이란 것이 다듬어지지 않거나, 성경의 유기적이고 입체적, 상황적인 맥락과 우리의 삶의 정황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잘못된 확신’일 수 있다.

필자는 어느 신학토론회에서 잘못된 확신으로 언쟁이 심해지는 것을 보았다. 서로가 상대방의 잘못된 교리나 인식을 지적하려고 애를 쓰는 그 모습은 마치 여러 맹인들이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져보는 그림과 같은 것이었다. 같은 말씀이라도 상황과 인식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적용시켜야 함을 성경 자체가 적시하고 있다(예.고전10:23~31). 교리와 헌법이란 틀이 교회의 질서와 신앙에 많은 도움을 줄찌라도 어느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그 틀을 깨야 할 때도 있다. 틀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신앙이 틀린 것처럼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신앙의 확신은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황을 무시한 잘못된 확신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 사회에 반하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선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바를 다시 점검하라. 물론 그 확신 중에는 어떤 상황에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 부분들은 변치 않는 믿음으로 간직하되 타인의 확신에 대해 어떻게 다르고 틀린지를 지혜롭게 생각하라. 그리고 변치않는 확신과 상황에 따랄 변할 수 있는 확신을 구별하는 지혜를 가지라. 타인과 여유있게 대화하면서 상대방의 확신을 존중하며 자신이 갖고 있는 확신을 바로 세워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무엇에든지 사랑과 이해, 포용으로 대하라. 그러면 자신이 갖는 확신은 진정한 영적 믿음에 서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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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위기를 극복하라”

부부 간에 갈등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성장배경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출생서열에 따라 배우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가령 장녀로 자란 아내와 장남으로 성장한 남편이 있을 때 서로 동생 다루듯 배우자를 조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밖에 성에 대한 인식, 배우자를 자신의 부모의 이미지로 보려는 습관 등 여러가지 부부 사이에 놓인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 것이다. 타고난 기질(Temper)위에 후천적으로 환경에 의해 조성되는 성격(Character)은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이한 속성이다. 부부가 서로 변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함께 산다는 것이 갈등 그 자체가 아닌가.

결혼 전 남녀가 서로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은 관능적이며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남녀가 처음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에로스적이면서 조건적인 호감 밖에는 안된다. 남녀가 상대방에 호기심을 갖게 되면 시험기를 거치고 애정기를 갖게 된다. 그 후 결혼하면 그 애정기가 평균적으로 오래 가지 않고 권태기에 이르른다. 권태기는 서로의 성격이 부딪치면서 너무나 다른 배우자에게 회의감을 갖게 되는 시기이다. 그 갈등의 폭이 너무 깊으면 이혼으로 이어지지만 권태기를 잘 극복한 부부는 성숙기에 접어드는 것이다. 대부분 이혼하는 부부는 권태기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부 생활에 권태기가 온다는 것은 부부에 있어서 참으로 힘든 시기이다.

한국의 통계에 의하면 425쌍 중 20%(80~90쌍)가 이미 11개월 전부터 이혼생각을 한다고 한다. 50%(약200쌍)는  3년전 부터이다. 이혼 생각의 심리적 단계를 보면, 1단계가 일방적인 결단을 하고 서로 관심이 없어진다. 2단계는 서로 속이며, 3단계는 절망, 상대방을 포기한다. 이 때 흔히 일과 약물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4단계는 옛애인을 찾아가거나 인테넷을 통해 이성을 구하기도 한다.

한국의 이혼율이  1/3이었지만, 요즘은 ½로 치닫고 있다. 결혼생활을 너무 단순한 생각으로 하지는 않는가. 이혼을 자기편의주의에 입각한 이기주의의 산물은 아닌가. 필자는 결혼을 앞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하나의 직업이나 전문업에 종사하기 위해 수년을 배우지 않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전문적인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 서로 다른 인격체가 만나는 결혼생활이지 않는가. 배우자를 이해하는 공감의 여유를 배워야 한다. 부부는 결코 같을 수 없다. 그 차이를 인정하라. 남성과 여성은  호르몬이나 뇌의 기능이 약간 다르다는 것도 기억하라.  예를 들면 남성은 뇌의 전두엽에만 언어능력이 있지만, 여성은 전두엽,측두엽,후두엽 모두 언어능력이 있다. 아내와 남편이 말다툼 할 때 아내는 남편의 표현력을 이해하고 대화의 템포를 맞추라. 남편도 아내를 말로 이기지 못할 때 급한 감정과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

부부는 자라오면서 각자 품은 상처들이 있다. 그 상처를 다스리지 않으면 배우자를 공격하는 뜨거운 수증기가 될 수 있다.  자신과 화해하라. 그러면 배우자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된다. 부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조절이다. 말과 감정 표현은 그야말로 부부 사이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아무리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기본 예의는 지켜야 한다. 만약 배우자의 거친 행동과 말이 있다면 현상 뒤에 본질을 보듯이, 그 원인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부부 화목은 가정 뿐 아니라, 교회, 사회의 초석이다.  부부가 무촌이라는 것은 영과 혼, 육이 서로 하나요, 배우자가 나 자신이라는 의미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배우자를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남편과 아내의 도리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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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의존적 사회를 만들려면”

클레어몬트 신학대의 설교학 교수인 캐티블랙(Kathy Black)은 < 치유설교학>이란 그의 저서에서 말하길, “자주적 독립정신의 모토가 강하게 지배하는 미국사회에서는, 사람은 각자가 스스로를 돌봐야 하고 사회나 국가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어 말하길,”저변에 깔린 선입관은 지체장애우들이 의존적이며 이들이 사회나 이웃에게 기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다.”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어디 미국사회 뿐인가. 세상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우리 생각 속에는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자들을 도와야 할 대상이라고만 믿고 있다. 

교회나 어느 사회단체를 보라. 장애우들이나 빈곤층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이들과 함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봉사활동을 독려한다. 참으로 훈훈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저변에 깔린 전제는 , 어려운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무엇을 협동하고 있다기 보다는 완전히 일방적으로 도움만 베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장애우 선교단체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이 있을 때 그는 “내가 그들을 섬기고 돕고 있다.”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자신의 선한 행동을 통해 자신만이 희생한다는 생각은 자기 의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디블랙의 말처럼, 삶을 서로 관계망의 관점에서 볼 때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혼자서 완전히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장애우들을 위해 봉사하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을 섬기고 도와주되 너도 그들에게 배울 것이 있으니 그게 뭔가를 생각하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감사하지 않겠는가.

인간은 서로 어떤 처지에 있던 상호의존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 반드시 기능적인 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과 혼,육적인 관계가 인간 사이에서 유기적이다. 가정과 교회, 사회가 그렇다. 그릇된 자주적인 독립 사상은 분열과 멸시를 낳는다. 개인주의는 영성에 있어서 가장 악한 것이다. 또한 한가지 주장만 고집하는 것도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이며 사상적 편의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자신은 국가와 사회, 이웃으로부터 항상 도움을 받는 존재임을 기억하라. 그래야 자신도 남을 돕고 이해하며 화해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한다.

요즘 한국의 정치 문제를 생각해보자. 국론이 분열되고 파당 분쟁이 심각한 것을 누구나 걱정하고 있다. 필자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옳다거나 상대방의 견해가 반드시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중도의 차원이 아니다. 가령 내 견해를 반대하는 상대가 있을 때 그 상대방이 갖고 있는 견해와 행동이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완전치 않으며 상대방이 옳은 부분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상대방을 흑백논리로 판단하지 말고 통전적(Holistic)으로 포용하자는 주장이다.

모든 사람들의 견해와 주장, 조건,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를 성숙시키는 요소들이 그 곳에 있으며 이웃과 융화하고 상호보완적인 삶 속에서 서로 겸허해질 수 있는, 자유롭고 생각의 풍요로운 삶이 약속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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