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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과 모호성”

유태인이며 정치철학자요, 평론가였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히히만(Eichmann In Jerusalem)’이란 책을 저술하면서 독일나치의 잔혹함을 알리려 하였다. 아히히만은 2차대전 당시 홀로코스트(Holocaust:대학살)의 전범으로 유태인 학살 사건에 가담한 자이다. 그는 전쟁후 남미로 도피하였으나 파라과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되었다. 사실, 아히히만은 숨어 있는 유태인들을 보호해 준적이 있다. 그는 평소 유태인에 대해 반감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유태인들 중에는 “나는 아히히만 때문에 살았다.”고 말한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극악무도한 유태인 대학살의 주범이 되었는가.
한나 아렌트는 그가 재판 받는 법정에 참석하여 그의 말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항변하기를 “나는 군인으로서 복종했을 뿐, 안했으면 군사재판으로 죽었다.”라고 하였다. 아히히만의 항변과 성품을 한참 듣고 목격한 후, 한나 아렌트는 책에 이렇게 썼다. “아히히만이 인간말종인 줄 알았더니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한 가정의 착실한 가장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히히만의 엄청난 죄악의 뒤에는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감과 가정을 보호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는 분명 전쟁의 흉악범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선한 인간이었다.
선과 악의 공존은 세상 역사는 물론, 사회와 한 개인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과연 선을 위해서 자신과 가정을 철저히 희생할 수 있는가. 국가나 회사에서, 또는 어느 단체에 종사하면서 상부의 부당한 지시가 있을 때 그것을 거부하고 모든 생존권을 포기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매사에 그럴 수 있다고 누가 과연 장담할 수 있는가. 한나 아렌트는 현실적이면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나도 그랬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상에는 악을 외면하고 선을 위해 완벽히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때로는 선과 악의 기준과 그 경계선을 긋기가 모호할 때가 많다. 그 경계선은 시대와 상황과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의 전쟁 영웅이 후에 민족의 모반자가 되어 처형되기도 한다. 역사와 인물에 대한 해석적 각도에 따라 행운과 불운, 민족의 구원자와 매국노로 나누기도 한다. 우리 주변의 어느 공동체 속에는 선을 행함 속에 숨겨진 악이 존재할 때가 있고, 악 속에서도 선이 있을 수 있다.
교회도 그렇지 아니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의 의와 선을 위해 존재하지 않던가. 그러나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불의가 존재하는가. 큰덩어리의 불의보다 사소하고 보이지 않는 불의 말이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것이지, 교회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교인 개개인에게는 많은 약점들이 있다. 바울의 고백처럼, 선과 악이 내 안에 있다. 그 선과 악은 어쩌면 뒤엉켜서 나로 하여금 사망의 길로 가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90%의 선이 아닌, 10%의 악이 나를 패망시키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악의 평범성과 모호성이 인간 사회를 분열시키고 절망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진가를 발견한다. 기독교 복음은 그 선과 악의 기준의 모호성과 평범성을 뛰어넘는 ‘은혜’를 선포한다. 우리의 무지로 행하는 모든 악과 불의를 묻지 않는다. 선과 악의 모호성에서 자유케 한다. 그리스도인은 악을 저버리고 선을 추구하되 선과 악의 얽힘 속에 종속되거나 패망하는 죄인으로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면, 치우친 해석의 각도에 따라 역사나 개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이 국민에게 평가절하되어 지탄을 받더라도 신앙인은 그의 공헌과 기여도를 참작하고 은혜와 이해로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 또한 악의 평범성과 모호성 때문에 그를 흑백논리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그런 삶의 자리에 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모호한 지식과 삶의 패턴에서 오직 필요한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 아닐까.